겨울이 끝났다. 유난히도 혹독한 계절이었다. 본래부터 워낙 추웠던 에그버트야 그렇다 치더라도 쿠블리움의 사막까지 서리가 하얗게 내렸다니, 가히 몇십 년만의 혹한이라 불리기에도 모자람이 없었다. 이 전례 없는 추위는 라플레타 역시 예외가 아니었던지라 모두가 눈이나 얼어붙은 빙판길을 피해 삼삼오오 무리를 지으며 외투 자락을 여미기 급급했다.
떼 지어 모인 사람에게는 날마다 새로운 소식이 입에서 입을 타고 흘렀다. 하루는 일가족이 동사한 채 발견되었다는 비보가 날아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국고를 풀고 기사단을 동원하여 한파에 대응하겠다는 왕명이 떨어졌다. 왕자, 아니- 이제 막 옥좌에 오른 젊은 왕의 결단으로.
늘 그렇듯 에스터가 유용하게, 그리고 적절하게 배치되어 소모되었다. 실질적으로 환자를 돌볼 수 있는 치유계 가이드는 물론이고 보조계열 가이드, 심지어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성싶은 센티넬까지 모조리 차출되었다. …켄드릭에게는 미안하게도, 나 역시 그랬다. 불꽃이 태울 수 있는 것은 비단 나무뿐만이 아니었으니까.
한동안 꽤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쌓인 눈을 녹이고, 눈이 녹아 고인 물을 말리고, 그 무게에 부서진 건물의 잔해를 치우고…. 처음에는 걱정스러운 낯으로 근처를 서성이며 일을 돕던 녀석도 금방 어디론가 잡혀간 듯, 보이지 않게 되었다. 나중에 물어물어 찾아가니 연구소에서의 경험을 이유로 임시 치료소에 배정되어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나. …잔뜩 뚱해진 것을 풀어주는데, 꼬박 한 나절이 걸렸더랬지.
이 모든 일이 하나의 해프닝에 불과할 정도로 많은 사건이 있었다. 그만큼 겨울은 길었고- 영영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모두가 봄을 바라면서도 그건 차라리 하나의 희망에 가까울 만큼 실체 없는 기도처럼 들렸다. 혹한은 예고 없이 갑작스럽게 끝이 났기에 사실을 깨닫는 데에는 시간이 제법 소요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긴 겨울이 끝났을 때. 새순을 틔우는 나무와 봉오리 진 꽃망울이 이 사실을 속살거렸을 때,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기쁨을 나타냈다. 마치 당연한 수순처럼 라플레타 전역에서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온갖 축제나 파티, 연회 같은 것이 벌어졌다. 지난겨울을 잊을 수 있을 만큼 즐거운 사건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모두가 암묵적으로 알아차린 것 같았다.
이에 왕궁이 다시 한번 발 빠르게 나섰다. 무려 일주일에 걸친 봄맞이 축제였다. 촉박한 시간, 갑작스러운 결정이었으나 왕궁의 주관하에 벌어지는 행사이니만큼 작은 잡음들은 손쉽게 묻혔다. 수도의 시민들은 기대감을 드러내며 거리를 단장하고 축제를 준비하는 일에 몰두했다.
왕명이 라플레타 전역에 퍼지자마자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숙박업소는 어떤 호객행위 없이도 빈방을 전부 내다 팔다 못해 창고까지 웃돈을 주고 비워주는 일이 성행했다. 일반 가정집까지 문을 활짝 열었음에도 불구하고 잘 곳을 찾지 못한 이들이 거리로 내몰렸다. 이에 이른 축제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더해지자 기사단원들은 하나같이 어떤 사태를 예상했다.
그리고 채 반나절이 지나기도 전, 기사단 전체에 비상이 선포되었다. 하하. 아직 축제는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춤을 추고 노래하며 취한 사람들로 거리가 북적였다. 당연지사 크고 작은 다툼이 이어졌다. 사건, 사고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접수되었지만 뭐,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 역시 밤낮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바빠졌으니까. 길거리의 아무나 붙잡고 라플레타에서 봄맞이 축제를 즐기지 못하는 이를 꼽으라면 누구든 첫째로는 우리를 들먹거릴 터였다. 사정을 아는 이웃들이 간혹 미안한 웃음과 함께 음식 바구니 같은 것을 안겨주고는 했으나 그 외에 마땅한 해결책이 있을 리가 없었다. 모든 기사단원이 축제가 끝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물론 켄드릭과 나 역시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우리는 때때로 어쩔 수 없는 부득이한 사정으로 인해 순찰 등의 임무를 지속할 수 없는 비상 상황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는 했다. 녀석은 축제 음식을, 나는 오락 거리를 주로 언급하긴 했지만 가장 먼저 단복의 처치를 우선시해야 함에는 의견이 일치했다. 펄럭이는 망토 같은 것을 어깨에 매달고 들판을 쏘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우리뿐만이 아니라 다른 기사들 역시 라플레타의 기사로써 마땅히 갖춰야 할 위기 대처 능력 따위를 증명하고 싶어 했고 실제로도 그럴 생각이 가득했으나 막상 계획을 실천으로 옮길만한 용기를 가진 이는 몇 없었다. 내가 그랬고, 다른 기사들도 그랬다.
켄드릭 리시안셔스만이 아니었다. 녀석은 단순한 희망 사항에 불과했던 계획을 실천으로 옮겼고 그 결과 얼굴 가득 기분 좋은 웃음을 지은 채 기사 한 사람을 붙잡아오기에 이르렀다. 축제의 마지막 날, 운 좋게도 비번 신청에 성공한 녀석이었다.
“아벨 씨, 알버트가 마지막 날 근무 바꿔주겠대요.”
“...진짜로? 아니, 왜?”
“저야 모르죠. 알버트가 바꿔주겠다고 한 거니까. 그렇지, 알버트?”
“그, 그래. 내가… 내가 양보한 거다? 절대로 어떤 강압도 없었고, 협박도 안 받았고! 절대로 현물자산 같은 건 주고받은 적도 없고! 특히 켄드-”
“그럼 전 알버트랑 근무 변경 신청하고 올게요. 아벨 씨 먼저 퇴근 준비하고 계세요.”
…하하. 냉큼 뒷덜미를 붙잡고 도망가는데 누구든 눈치채지 않을 수가 없었지만, 또 그만큼 모르는 척 할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솔깃하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일 테고. 켄드릭의 성정이나 행동으로 봤을 때 맨입으로 그런 강탈… 음, 이 단어는 적절하지 않지. 교환을 시도하지는 않았으리라 믿었다. 추후 내가 물어봤을 때 사실을 털어놓으려면 체면치레정도는 해야 할 테고. 그럼 적어도 아주 못된 짓은 하지 않았겠지. …알버트에게는 미안하지만. 나중에 따로 찾아가 보기라도 해야겠군.
그렇게 자기합리화의 과정을 거치고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니- 벌써 축제의 마지막 날이었다. 모든 날이 다 그랬지만 특히 어젯밤은 끔찍했다, 고 표현해도 과하지 않을 만큼… 엉망이었다. 오늘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정말 눈 딱 감고 도망갔을지도.
지난 일주일… 아니, 그보다 더 오랫동안 혹사당한 에스터답게 휴일의 시작은 점심때가 훌쩍 넘어 늦은 오후부터였다. 내가 눈을 떴을 때, 드물게도 켄드릭은 아직 잠든 채였다. 평소대로라면 나보다 늦게 잠들어 일찍 일어나는 편이니만큼 자는 모습을 보기 힘들었는데. 녀석에게도 심심치 않게 털어놓고는 했지만, 나는 켄드릭의 자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어떤 근심도 없이 순하게 잠들어있는 것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꼭 10년하고도 그 반 정도의 먼 과거를 헤아릴 수 있었다.
그땐 작고 조그매서 신경 쓰였고, 일부러 챙겨주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방문을 잠그고 들어가 훌쩍댈 것 같이 굴었는데. 언제 이렇게 커서는. …이러니 매번 나더러 조그맣다는 말하는 것도 타박할 수야 없겠다, 싶다.
제멋대로 구불거리는 갈색 머리카락이 아무렇게나 헝클어진 채 고른 간격을 두고 부풀었다가, 쪼그라들기를 반복했다. 드리운 커튼 사이로 비치는 햇빛이 달았다. 너무 밝은 빛이 눈가에 닿을까 두려워 손차양을 만들었다.
오늘 하루만큼은 제대로 여유를 즐길 심산이었다. 우선은 늦은 점심을 차려주어야겠다. 집을 나서면 온갖 축제 음식이 유혹적인 냄새를 풍기며 우리를 반길 테고, 내내 벼르고 있던 모양이니 끼니는 챙기지 않아도 될지도 모르지만, 켄드릭은 집에서 먹는 음식을 거르는 일을 좋아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생경하던 습관도 어느 순간부터는 그러려니 싶었고, 이제는 완전히 물들어 스스로 같은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간단하게 차리는 것이 좋겠다. …오믈렛과 우유 정도면 되려나. 매번 녀석이 차렸으니 오늘은 오랜만에 팬을 달구게 되겠구나, 싶다. 오랜만에 마주 보고 점심을 먹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갈아입고 축제 구경을 나서면 되겠지. …아, 구경하러 나가기 전 밀린 빨래부터 해둘까. 햇빛이 좋으니 바깥에 널어두면 잘 마를 텐데.
생각을 거듭하다 기어코 시선이 창밖으로 닿았다. 따뜻한 햇빛이 마당 가득했다. 창을 열면 분명 가벼운 봄바람이 불고 있을 것이다. …몸이 달았다. 가만히 누워있기에는 날이 너무 좋았다. 봄이라는 미명하에 어떤 짓을 해도 용서받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것이 설령 오랜만의 휴일을 맞아 늦잠 자는 애인을 억지로 깨우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어쩔까, 고민했으나 그리 긴 시간 이어지는 종류는 아니었다. 그대로 몸을 숙여 귓가에 조그맣게 속삭였다.
“...켄드릭, 요 늦잠꾸러기! 언제까지 잘 생각인가?!”
그다지 작은 목소리가 아니라는 생각은, 늘 그렇듯 뒤늦게 찾아오는 깨달음이었다.
💐
“흐아아암….”
“엇, 아직 졸린가? 역시 그때 깨우지 말고 좀 더 재웠어야…!”
“됐거든요. 아벨 씨가 깨워주는 건 좋지만… 모닝 키스로 깨워주는 게 더 좋았을 텐데….”
“녀석, 아직 잠이 덜 깬 모양이군.”
기대대로 날이 좋았다. 궂은날 뒤 갠 하늘이 더 맑다더니 꼭 그동안의 추위를 보상이라도 하는 듯싶었다. 들판은 온통 푸릇한 새싹으로 가득했고 골목마다 낮은 화단과 높은 꽃나무를 가릴 것 없이 꽃이 만개하여 흐드러졌다. 가벼운 산들바람이라도 일면 여린 꽃잎들이 흩날려 형형색색의 눈이 오는 것 같은 광경이 펼쳐졌다. 어떤 에스터도 쉽게 만들어낼 수 없는 환상 같은 풍경에 내리는 꽃비마다 탄성이 끊이지를 않았다.
뭐, 내 옆에 서 슬렁슬렁 걷는 채로 하품이나 하는 누구누구는 그런 절경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었지만. 기실 녀석의 시선은 축제의 볼거리나 장식보다는 내게 더 자주 돌아오곤 했다. …모르는 척하려고 해도 너무 눈에 띈단 말이지.
괜히 간지럽지도 않은 콧잔등을 긁적이다가 마침 들고 있던 과일꼬치를 내밀었다.
“먹겠나?”
“배부르세요?”
나오기 전, 집에서 끼니를 때운 것이 무색하게도 골목 몇 개를 돌아다니며 눈에 띄는 노점들을 들른 참이었다. 켄드릭 녀석은 그러고도 배가 덜 찬 모양인지 끄떡없어 보였지만, 솔직히 말해 이제 한계였다. 마지막으로 먹은 샌드위치는 먹지 말걸. …하지만 맛있었지. 꿋꿋하게 내민 꼬치로 녀석의 입가를 쿡쿡 찔러대자 켄드릭은 별말 없이 입으로 받아먹었다.
“조금 많이 먹었나, 마저 먹으면 터질 것 같지 뭐냐.”
“흐음, 사람은 그렇게 쉽게 안 터지던데요.”
“너….”
“아, 저거 아벨 씨 하고 싶으셨던 거 아니에요?”
“어디?”
고개를 쭉 내밀자 널찍한 야외 공터에 몰린 인파가 있었다. 한쪽에서는 일렬로 길게 줄을 서 있다가 이따금 앞을 기웃대는 것이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떼거리 같았고, 다른 쪽에서는 빈터를 빙 둘러싸고 모여 있는 것이 터 안의 무언가를 구경하는 듯 보였다. 종종 왁자지껄한 웃음이 터지거나 감탄사가 흘러나오는 것으로 보아 모르긴 몰라도 꽤 좋은 구경거리인가보다 싶었다.
흥미가 생겨 켄드릭을 밀어대다시피 하며-아벨 씨도 차암, 하는 웃음소리는 가볍게 무시한 채- 지척까지 이르자 마침 때맞추어 익숙한 폭발음 이후, 와르르하는 폭소가 터져 나왔다.
…어라, 이 소리는? 어쩐지 나도 모르게 켄드릭을 쳐다보자 고개를 끄덕였다.
“총소리 맞아요. 과녁 맞히기를 하는 것 같은데 활이나 단검이 아니라니 좀 특이하네요. 진품은 아닌 것 같고… 보실래요?”
“또 나를 번쩍 들어 올릴 심산이라면 포기해라. 그보다… 자, 늦으면 그만큼 줄이 더 길어진다고! 이쪽이다!”
앞선 줄이 길어 오래 기다려야겠다 마음먹었던 것이 무색하게도 순서는 생각보다 빨리 돌아왔다. 다들 일찌감치 탈락해버리거나 포기해버린 탓인 듯했다. 하긴, 기사나 총포상, 아니면 사냥꾼 같은 이들이 아니고서야 평범한 일반인에게 총은 지금까지도 쉽게 접할 수 없는 무기였으니까. 생전 처음 잡아보는 것으로 몇 미터 떨어진 과녁을, 그것도 정중앙을 맞히라니. 좀 너무하다 싶은 오락거리였다.
주위에서 수군대는 말을 듣자 하니 여태껏 축제 기간에 1등 상품을 타가는 데 성공한 이는 한 손가락으로 꼽는 듯싶었다. 적어도 그중 반은 비번인 기사, 혹은 관련 종사자라는 사실에 내일 먹을 간식을 걸 수도 있다고.
…뭐, 제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우리에게는 켄드릭이 있으니까! 초롱초롱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자니 금세 시선이 마주쳤다.
“...왜요? 완전 수상한 눈빛.”
“무슨 소리냐! 그게 아니라- 네가 있으니까 1등 상품도 거뜬하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다.”
“그거야 당연하죠. 1등 상 가지고 싶어요?”
짧은 우스갯소리를 하며 시시덕거리고 있자니 어느 틈엔가 싹싹해 보이는 중년 남성이 장전된 총 한 자루를 들고 우리 둘을 향해 돌아섰다.
“오, 이번 도전자는 든든한 남자분들이시네요. 이거 저희도 조심해야겠어요!”
사람 좋게 웃는 노점상의 손에 들린 총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보아하니 당연히 장난감 총, 장전된 것은 가짜 탄환이었다. 그래도 꽤 정교하게 만들어진 모양이라 실물과 비슷한 방식으로 사용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간단한 사용법이라도 알려주려는 듯 총신을 흔들며 무어라 말을 이으려 했다. 순간 시야에 들어온 것은 그 너머, 등수에 따른 상품을 보란 듯이 진열해놓은 단상이었다.
참가상으로 작은 화환, 3등 상품은 곰이나 토끼, 강아지 등 동물 인형이 줄지어 있었고 2등은 꽤 상등품의 고급 주류였다. 단상의 가장 높은 곳에 놓여있는 것은… 무려 꽃 모양으로 세공된 보석 장신구가 아니던가. 노점상의 상품이라기엔 꽤 힘주어 마련한 것처럼 보였다.
“저 장신구, 진짜입니까?”
“어이구, 그럼요. 물론 나라님들이나 부유한 분들이 보시기에는 하찮은 하품이지만요, 그래도 길거리에 나돌만한 것은 아닙니다? 즐거운 자리라 큰마음 먹고 내놓았습죠.”
“겸사겸사 주목도 모으고요?”
“하하. 상재가 좀 있으신 분이네. 그래서 어느 분이 도전하시겠습니까?”
내내 우리 앞에 서 있던 청년이 방금 막, 마지막 탄환을 쏘려다가 반동을 견디지 못하고 총을 떨어트린 참이었다. …아니, 장난감에 반동이 있으면 안 되는 것 아닌가?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걸어 나가는 청년의 머리 위에 참가상인 화환이 보기 좋게 놓였다. 그리고 동시에 어떤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당연한 듯 총을 넘겨받아 허공을 겨눠보던 켄드릭 앞으로 쓱 나서자 두 사람분의 시선이 고스란히 내게 몰렸다. 당연하게도.
“켄, 내가 해봐도 되겠나?”
“에. 그야 상관없지만….”
우물거리면서 삼킨 말이 고스란히 귓가에 들리는 것 같은 기분에 샐쭉 웃었다. 그러나 다시 물러서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나는 기어코 녀석에게서 총을 받아내 경계선에 섰고, 노점상은 우리 두 사람의 반응에서 무언가를 알아차렸는지 내내 희희낙락한 표정이었다.
제대로 자세를 잡기 전, 켄드릭의 어깨를 가볍게 툭 쳐주었다.
“후후, 나만 믿도록! 이렇게 보여도 사격은 네게 몇 번이고 배웠으니까.”
배운 대로 총구보다 조금 더 위. 시야 저편으로 과녁을 응시함과 동시에 어떤 예감이 들었다. 절대로 실패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
“...아벨 씨이.”
“왜 그렇게 입이 튀어나와 있… 프흐흐.”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과녁을 맞히지 못했다. 생각보다 거리가 더 멀더라고, 하하. 그래도 원하던 바를 이루는 데는 성공했으니 그럭저럭 괜찮은… 아니, 아주 훌륭한 결과가 아닌가? 켄드릭 머리 위에 얹혀 고정된 채 존재감을 드러내는 작고 예쁜 화환을 보고 있으려니 웃지 않으려 해도 웃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예쁜 것 위에 예쁜 것, 아주 그럴듯하다.
“아벨 씨, 진짜 저도 한 번만 해보고 오면 안 돼요? 딱 한 발만요.”
“안-된-다-니-까.”
뭐, 켄드릭은 별로 만족스럽지 않은 모양이었지만. 적어도 내 머리 위에 똑같은 화환 하나를 얹어보고 싶은 눈치였지만 어림도 없지! 나는 자꾸 미적대는 녀석을 끌고 그대로 자리를 피했다. 딱히 목적지는 없었다. 우선 화환에서부터 켄드릭을 멀리 떨어트려 놓는 것이 중요했으니.
“진짜 딱 한 발만 쏘면 되는데….”
“어허! 그보다- 어라, 어디서 음악 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 않나?”
녀석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아무렇게나 주워섬긴 말이었으나 아주 거짓은 아니었다. 경쾌한 리듬의 음악이 인파의 소음 속에서도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것도 꽤 지척에서.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노랫소리를 따라 움직였다. 골목 두어 개를 지나자 소리의 근원을 마주할 수 있었다. 아까보다 좀 더 작은 터에 적은 수의 사람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쓰고 남아 모아둔 상자나 나무통 위에 아무렇게나 앉아 저마다의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 통일성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데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전문 악사가 아닌 일반인들이 즉흥적으로 모여든 것에 가까워 보였다. 분명 축제의 흥겨움을 참지 못한 것이리라. 솔직히 말해 가까이에서 들은 음악은 훨씬 더 엉망진창이었으나 그만큼 더 듣기가 좋았다. 즐거움, 유쾌함, 웃음… 그런 긍정적인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졌으므로.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 뒤로 둘, 혹은 셋이 모여 춤을 추는 이들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엉망이면서도 즐거워 보였다. 그래, 내친김에 스스로 신발을 벗어 던지고 그 무리에 끼어들 생각을 하게 될 만큼.
“켄, 우리도 한 곡 출까?”
“아벨 씨, 저 춤 못 추는 거 아시면서….”
벗어든 신을 들고 어디에 놓아야 밟히지 않을까 살피고 있으려니 한껏 우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세상에, 아직도 그대로였다! 이거 안 되겠다 싶어 신발을 내려두는 대신 반대쪽 손을 내밀었다. 내내 곤란한 듯 늘어진 눈에 의아함이 감도는 것을 조금, 즐겁게 쳐다보았다.
“거짓말 마라, 그리고 설령 못 추면 좀 어때. 이렇게 날이 좋은데! 아니면 설마- 나랑 추는 것이 싫은가?”
“그럴 리가 없잖아요!”
마지막 말이 치명타였다. 손을 잡고 난 뒤 아차 하는 표정이 꼭, 생각보다 행동이 먼저 앞선 듯싶었다. 꼭 이렇게 두 번씩 손이 간다니까. 뭐, 그게 귀여운 거지만.
어느덧 연주되던 곡이 후반부에 접어들었다. 반복되는 후렴구가 점차 빨라지며 들판 위에서 춤추는 이들의 움직임 역시 리듬을 따랐다. 빙글빙글 도는 몸짓이 꼭 봄바람에 흩날리는 꽃잎들처럼 보였다. 특히 옷자락이 흔들리면 차라리 한 송이 꽃이라 불러도 틀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
어디를 보아도 웃고 떠드는 사람투성이였다. 개구쟁이 아이들의 함박웃음, 나란히 앉은 노부부의 흔들리는 발끝, 옹기종기 모여 악기를 연주하는 악단을 지나쳐 시선을 쭉- 돌리면, 비로소 네가 있었다. 몸을 구부려 막 신발을 벗던 찰나. 눈이 마주쳤다. 그런 와중에도 잡은 손은 흔들림이 없다.
“...왜요?”
가끔 털어놓을 수 없는 비밀이 생긴다. 그보다 자주,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받는다. 그리고 요즘에는 허투루 표현할 수 없는 때가 많다. 이를테면 아침에 눈을 뜨면 기다렸다는 듯 건네지는 인사라던가, 마주 앉아 먹는 빵에 모양 내 발라진 잼, 나란히 놓인 신발 두 켤레 같은 것들이…. 지금도 마찬가지로.
그럴듯한 단어를 찾지 못한 감정에 굳이 이름을 붙여야 한다면 이 순간은 어떤 이름을 가지게 될까. 무엇이라고 불러야 좋을지 도통 알 수가 없다. 그 어떤 아름다운 단어를 빗대어도 빛바래고 만다. 이름 모를 정서가 서성대면 어쩐지 울어버릴 것만 같아서 그저 눈을 깜빡였다.
찰나, 봄이었다.
“아벨 씨,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얼굴을 쓱 닦아내는 손짓에 불현듯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폐부를 가득 채우는 공기가 어지럽게 달았다. 해명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내내 이유를 손에 쥔 채였으니까.
벗어놓은 가죽신 옆에 제 신발을 내려놓았다. 다른 크기의 신발 두 켤레가 나란히 놓여있는 것이 퍽 보기 좋았다. 함께 있으니 춤추며 뛰어다니는 이들에게 밟혀도 괜찮을 것만 같았다. 함께, 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었다.
노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경쾌한 리듬이 머리카락을 헝클어놓는 것이 꼭 재촉하는 것 같다. 앞서 개화한 꽃들이 제멋대로 이리 돌고 저리 도는 모양이 선연하다. 어쩐지 마음부터 들뜨는 것이 꼭 마법처럼 느껴졌다. …봄이라는 미명하에 모든 것이 허락될 것 같았다.
그러니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잡은 손에 힘을 주고, 그대로 잡아당겼다. 속절없이 이끌리는 대로, 우리가.
“리시안셔스, 내 꽃. 피러가자!”
흐드러지게 피었다.
💐
너는 꽃의 이름을 한 봄일 것이다. 서로 다른 세 번의 계절이 오고 간 뒤에도 변함없는 꽃일 테다. 네가 나를 향해 웃을 때면 나는 그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어떤 눈으로, 또 어떤 낯으로 피어나는지 너는 영영 모르겠지. 다만 이 모든 것이 사랑이라면, 우리가 하나의 부케 안에서 같은 낱말을 공유하게 된다면…. 내가 너의 꽃말이 되어도 괜찮지 않을까. 내가 널, 그렇게 감히 영원을 약속하겠노라고.
그래. 네가 날 꽃피운 거야. 그리하여 마침내 네가,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