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람 전*
이 글은 카롱님의 크툴루의 부름 팬메이드 시나리오 <블루버드 칼리지> 시리즈의 세계관에 기반합니다. 스포일러를 일부 포함할 수 있습니다.




무기한 연기되었던 졸업연주회는 겨울 끄트머리에 다시 잡혔다. 아무렴 기한 없대도 이번 4학년의 졸업 전에는 있어야 할 의례니까. 국왕이 참석하고 모두가 주목하는 행사를 취소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다행히 수석 연주자와 그의 작곡가는 졸업을 고작 몇 주 앞에 두고 학교로 돌아왔다.


어째서 둘이 연고도 없는 지방 끄트머리에서 발견되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제이와 일레인을 처음 발견한 백작은 팔 걷어붙이고 블루버드 칼리지로의 귀환을 도왔다. 제이는 마차까지 내어주며 수도에 데려다 주겠다는 변경백을 수상쩍게 여겼으나, 레인의 동의를 말릴 의사는 없었다. 일레인 에반스의 경우, 생초면인 사람에게 선의를 베푸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 것 정도야 알았으나, 사양할 정도로 낯짝이 얇지 않았고. 애초에 그의 사고관은 참 안일하다;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제이 손 붙잡고 도망치면 된다.


“넌…… 됐다.”

“말을 하다가 말어.”


타박해도 무슨 뜻으로 운을 뗐는지는 훤히 알아서, 일레인이 제이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매번 찔리면서도 남자앤 시선만 흘기고 말았다.

“그래도 같이 갈 거잖아.”

“그럼 설마 너만 혼자 보내겠냐…”


제이 제스터가 일레인 에반스의 손을 놓지 않는다는 사실은 경험적으로 알았으니 근거 없는 여유는 아니다. 기억의 윤곽이 명도를 잃어도 선명했던 감정은 피부 안쪽에 켜켜이 쌓인다. 긴 기간 동안 쌓아온 우호와 신의, 애정은 사람을 형성한다. 한 점 희푸른 조각이었던 감정은 확장하고 확산하여 자아를 채운다, 그리하여 그 어떤 것보다 견고한 확신이 된다.



마차를 타고 수도로 돌아오는 나흘 간 경위를 고찰했으나 지난 며칠의 기억은 더 희미해져 가기만 했다. 되려 유년기 시절의 것보다 흐리멍덩해지니, 머리가 아파지기 시작한 레인은 사건을 마법이라고 축약해버렸다. 학장의 힐난 어린 시선은 일레인 에반스의 무성의한 답변 이후 제이 제스터에게 옮겨갔으나, 룸메이트는 늘 그렇듯이 부연에는 별 재주가 없었으니 도움은 안 됐다.


따지자면 둘의 처지에서는 억울하기만 한 일이다. 성인이 되어서 가출한 청소년 취급을 받자니 입이 댓발 튀어나온 레인이 덧붙였다.

“그래도 제때 돌아왔잖아요. 예비 궁정 예술가의 졸업 기획에 흠집 하나 안 났다고요.”

그 답변이 만족스러웠는지, 혹은 그저 체념하여 추궁하기를 포기했는지 몰라도 학장은 더 캐묻지 않았다.



저번에 맞췄던 코사지는 마차에 올라타며 잃어버렸고, 학교에서 기껏 준비해주었던 검은 드레스는 찢어졌으니 모두 새로 맞춰야 했다. 지나친 물욕이나 허장성세에 연 닿은 적은 없어도 지갑 사정이 얄팍해본 적 없는 에반스에게 별로 문젯거리가 되는 일은 아니다. 두 사람은 늘 가던 카페에서 아이스 초콜릿과 레모네이드를 한 잔씩 주문했고, 서로의 거리보다 먼 손에 음료를 쥔 채 이제는 자주 찾지 않을 거리를 에둘러 거닐었다. 얼음 든 잔보다야 따뜻한 차가 어울릴 겨울이었지만 레인이 멋대로 시키며 고집을 부렸다.


“원래 겨울엔 찬 거 마셔야 해.”

“네 것만 그렇게 시켜도 되잖아.”

그건 또 어디서 들은 소리냐는 듯 노란 시선이 굴러가 닿자, 여자애가 모른 척 어깨만 으쓱였다.

“왜, 기념적이고 좋잖아. 여기 처음 왔을 때가 어제 같은데.”


추우면 한 손은 비었다는 둥, 안겨도 된다는 둥 추파를 던지며 시원스럽게 웃는 얼굴을 제이는 한참 보다가, 기꺼이 제 손 내줬다. 이런 종류의 상호 접촉이 없었던 것도 아닌데 미묘하게 얼떨떨한 얼굴로 레인이 대꾸했다.

“...뭐야?”

“잡고 싶어하는 것 같길래.”


정말 말 그대로의 의미였을 텐데도 행간에서 뜻을 찾으려 레인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기술했듯 그 정도로 낯짝이 얇지 않아 사양했다는 뜻은 못 된다. 맞잡은 손은 부토니에와 코사지를 고를 꽃집에 도착할 때가 되어서야 떨어졌는데, 일레인은 그러고도 한참 동안 제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드레스를 고르는 일은 실비가 도왔다. 그는 연주자 본인보다 더 열성적이었으므로 레인은 이 간여를 과연 ‘도움’ 수준으로 간주해도 될지 의문스러웠다. 이번에도 저번과 크게 다르지 않은 파란 장미 코사지를 들고 온 일레인을 앞에 두고 절친한 친구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는데, 그 대목에서 소년은 이 시착 시간이 짧게는 끝나지 않을 것임을 짐작했다.


“도대체 세상에 누가 드레스를 코사지에 맞추니?”

“내가?”

“흐으으으음.”

눈을 가늘게 뜬 실비가 합당한 의문을 제기했다.

“역시 제이랑 맞춘 거지?”

“얼레.”


어떻게 알았느냔 표정으로 대답하자 실비가 머리카락을 돌돌 꼬며 새침하게 나름의 근거를 나열했다. 어머, 생전 액세서리는 관심도 없던 애가 귀는 한쪽만 뚫었잖아. 너희 사이 좋은 거야 전교생이 다 알고. 얘, 저번에는 둘이서 동부 여행도 다녀왔다며? (“그건 놀러 간 게 아니었다니까. 아직도 심통이야?”) 애당초 네가 뭐가 아까워서 그렇게 빠져 사는지 모르겠어.


“...... 뭐? 내가 어쨌다고?”







연주회는 성황리에 마쳤다. 자랑스러운 룸메이트의 모습을 하고서 앉아있겠다던 제이는 그 말 그대로 유난히 단장한 모습으로 객석에서 찾을 수 있었다. 고작 짝사랑 좀 하게 된 일로 얼굴 붉힐 위인은 못 되어서, 레인은 또렷하게 여는 노래의 작곡가를 응시하고 히죽 웃었다. 가슴엔 일레인과 맞춘 장미 부토니에가, 잘 보이지 않는 거리라지만 귀엔 푸르스름한 큐빅 끼워진 것이 못내 마음에 찼다. 매사 한색이라고는 지독하게 안 어울리던 얼굴인데, 오늘은 어쩐지 그 대비조차 유쾌하게 느껴졌다. 남자앤 이쪽을 보고 손을 흔들었고, 앙코르가 끝나 모두가 박수를 칠 때까지 자리에서 뜨지 않았다.


결말 판결은 또 다른 이야기의 효시가 된다.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라는 투박한 문장 뒤에도 삶은 항구성을 지녀, 붉게 빛나다가도 푸르게 식는다. 모처럼 레인은 그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