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익은 장미꽃 꽃다발을 샀다.


불꽃과 파도의 같은 성질을 논하자면 흐르는 것으로, 둘은 쭉 걸었고 마침내 한 지점에서 만났다. 불꽃이 빙 돌아왔고 물길이 빨리 흘러 두 손을 맞잡아도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그렇게 다시 둘이 연인이 되었다는 건 우리는 꽤 오랫동안 안 이야기다.


그간 남자는 변화와 영속에 관한 생각을 했다. 어린 시절의 고집에 작별을 고하고 선 안에 조금 더 많은 것들을 들였으니까. 도깨비들이 곤히 자는 아기의 머리맡에서 구경하는 걸 내치지 않은 건 그의 변화고, 그들이 불퉁맞은 새 집주인을 오랜 추억 속에서 기억하여 자릴 떠나지 않고 계속 머문 건 그들의 영속이다. 이게 어떤 형태의 사랑인지 재익은 아직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흔적을 돌아보면 잘 대하지 않았던 적이 더 많으니까. 그들은 자신에게서 무엇을 보나? 그을린 불꽃의 그림자 속에서 노인의 다정함을 그리워하는지. 불 냄새를 두려워하면서도 자리를 더트고 앉은 까닭을 그는 물어본 적 없다.

그는 인간과의 연에 더 충실한 인물이었음에도 이전번의 결별은 별로 좋은 모양이 되지 못했다. 심지가 곧아도 휘청이며 꺼질 만한 때가 있었고, 사랑을 밀어내는 건 영속의 가능성을 끊는 일이다. 그러나 등불이 아롱이던 밤에 여자는 그의 연줄을 다시 붙잡았고, 받아들임으로써 변화는 다시 영속으로 이어진다. 그때의 정원에서는 꽃이 피기 전 싱그러운 풀의 향내가 났고, 청차의 미온한 단맛과 귀뚜라미의 조용한 울음소리가 기억을 덧그렸다.


기르고 돌보는 것에 소질이 없다 생각했건만 실상은 썩 그렇지 않았는지, 정원의 식물들은 옛날 모습 그대로 자리했고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원래 있던 것들과 그가 새로 심은 것들은 대부분 명줄이 질기고 튼튼하여 웬만해서는 자리를 오래 지키는 종류다. 이야기만 들은 조부와 지금 자리하는 손주의 꼭 닮은 점을 느끼며 여자는 손을 내밀어 문을 두드린다. 김혜진은 더 이상 여기의 이방인이 아니다. 그가 달고 오는 자기 무릎보다 짧은 키의 여자애도. 방문은 익숙하고 아늑하다.

재익은 마루에 드러누워 선선한 바닥에 피부를 대는 혜진을 바라본다. 봄날엔 모처럼 비가 내리고, 장예지는 미지근한 안방에서 자고 있으며, 김햇님은 오늘도 도깨비들이랑 인사를 하겠다 집 안 구석구석을 뒤진다. 습기를 머금은 나무와 짙은 흙냄새 위로 지난주의 안부를 묻는 목소리가 얹히면 차를 끓이겠다 대답하는 게 어느새 일과가 됐다. 이건 그가 태가 나지 않게 그리워하던 안온함이다. 어딜 가도 군계일학처럼 머리통 하나가 삐져나오던 자가 필요했던, 몸을 뉘일 수 있는 무른 자리.

그래서인지 그는 긴장하지 않았다. ……사실 따지라면 몇 년 전의 비슷한 순간에도 긴장은 안 했다. 그는 언제고 확신이 있어야만 입을 여는 부류고, 가장 가까이에 머무르는 사람들이 그걸 모르기는 참 힘든 일이라. 찻상을 준비하는 동안 선수는 햇님이 쳤다. 언제 안방에 들어갔다 나왔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히죽이는 게 엄마 판박이라 재익은 좀 웃었다. “햇감자, 네가 그거 엄마 갖다 줄 거야?” 하면 발 구르는 소리가 이미 신이 났다. 혜진이 느리게 몸을 일으켰고, 재익은 아주 일상적인 어조로 운을 뗐다. “누나만 괜찮으면 우리 결혼할까,” 하는, 무드 없고 아주 그다운 청혼 뒤로 햇님이 빨간 장미꽃 다발을 들고나왔다.